현재 위치

  1. HOME
  2. 뉴스센터
  3. 공지사항

공지사항

게시판 상세
제목 [동아일보] 넌 오뎅이냐? 어묵이냐?_2011.12.17
작성자 영진어묵 (ip:)
  • 작성일 2014-10-09 04:55:57
  • 추천 추천하기
  • 조회수 2089
평점 0점

한 겨울 밤 뜨거운 유혹, 원조 오뎅을 부산서 만나다

찬바람이 불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따끈한 어묵탕. 이와 관련한 추억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어묵은 우리나라 사람 누구나 즐기는 음식이지만, 일본에서 유래했다는 이유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기도 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 눈비가 오락가락하니 으슬으슬하면서 춥다. 따끈한 오뎅 국물이 생각난다. 퇴근길 집사람을 불러내 동네 포장마차에서 오뎅 몇 꼬치를 먹는다.‘쫄깃쫄깃 이렇게 맛있는 오뎅은 언제, 어디서 생겨났을까.’그때 문득 바닥의 종이상자가 눈에 들어온다. ‘부산 어묵’이라고 씌어 있다. ‘그래, 그렇잖아도 몸이 근질근질하던 차에 잘됐다. 원조 오뎅을 만나러 부산으로 떠나 보자.’ 》



○ 당신은 누구신지요?

그의 모습은 서울에서 보던 친척들과 약간 다른 것 같았다. 살색이 좀 더 노르스름하다고나 할까. 몸매도 더 탄력 있는 듯했다. 부산이 남쪽이라 살이 더 탄 것일까. 웃음을 지으며 첫 질문을 던졌다.

기자 “안녕하세요? 서울에서 온 기자입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그의 이름과 관련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어 왔다.)

어묵 “원래 우리 할배 때까지는 오뎅이라 캤는데, 아부지 때 어묵이란 이름이 생겼어요. 요즘도 동네 사람들은 그냥 오뎅이라고 불러요. 왜정 때는 가마보코라 캤는데요. 요즘은 그 말은 안 씁니더.”

‘오뎅을 어묵이라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어묵은 생선살을 으깨 반죽한 것을 튀기거나 찌거나 구운 음식이고, 오뎅은 이 어묵과 유부 무 곤약 따위를 꼬챙이에 꿰어 맑은 장국에 끓인 음식을 말한다. 어묵은 오뎅의 재료일 뿐인데, 그 재료에 음식의 이름이 붙은 것이다.’ (‘한국음식문화 박물지’, 황교익)

일제강점기 때의 국내 신문을 살펴보면 가마보꼬, 가마보고, 가마보교 등의 표현이 등장한다. 오뎅집이란 표현도 화재나 절도 등 각종 사건사고 기사에 종종 나오는데, 여기서 오뎅은 어묵을 꼬치에 꿰어 끓인 음식이란 원래의 뜻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오뎅집이 꽤 많았지만 광복과 6·25전쟁 이후 급속히 사라져갔다. 서울 무교동 등지의 ‘정종집’이 일제강점기 오뎅집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일본 어묵인 가마보코(蒲)는 날생선 살을 갈아 소금과 조미료를 넣고 잘 섞은 것을 모양을 다듬어 찌거나, 굽거나, 튀기거나, 삶거나 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튀김 중심으로 어묵 제조가 발달했다. 가마보코는 헤이안(794∼1192) 시대부터 봉건 영주들을 치하하는 잔칫상에 올려졌다는 기록이 문헌에 남아 있다.(두산동아백과사전)

한편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말에는 일본인들이 어묵의 주재료인 조기를 조선에서 남획해 우리 어민과 소비자들이 곤란을 겪었다는 기사가 등장하기도 했다.


○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기자 “원래 일본 출신인가요?”

어묵 “우리 5대조인가 6대조 할배가 일본서 오셨다카대요. 그때 일가친척들도 마이 건너오고.”

기자 “일가가 모두 부산에 정착하신 건가요?”

어묵 “아이라요. 본래는 일본 어민들이 들어와 산 항구엔 거진 다 들어왔다 아입니까. 마산, 군산, 여수, 목포, 부산으로 말입니더. 그라다가 나중에 부산에 마이 모여 살게 된 겁니더.”

제국주의의 광풍이 불던 19세기 말∼20세기 초. 한반도의 큰 항구를 중심으로 일본인이 대거 이주하기 시작했고, 당연히 일본 음식도 함께 들어왔다. 그중 어묵이 섞여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식으로 만들어지던 어묵은 광복 후 조선인들이 공장을 인수하거나 새로 설립하면서 한국풍이 가미되기 시작했다. 예전엔 냉동기술과 설비의 발달이 더뎌 어묵공장이 거의 다 바닷가를 중심으로 운영됐다. 항구도시 출신들은 지금도 어린시절 먹던, 바로 튀겨낸 어묵 맛을 잊지 못한다. 다음은 음식평론가 황교익 씨의 회상이다.

“1960년대 마산 바닷가 부두 바로 옆에 오뎅 공장이 있었어요. 어머니 치맛자락을 잡고 그 근처에 가면 고소한 냄새가 정말 끝내줬지요. 당시에는 깡치(조기 새끼)나 풀치(갈치 새끼) 같은 잡어를 통째로 삽으로 퍼서 기계에 넣고 갈아낸 후 정어리기름(고래기름을 쓰는 곳도 있었음)에 튀겨냈어요. 내장이 들어가서, 생선 갈아낸 것이 커피 간 것보다 색이 더 짙었고 약간 쓴맛도 났지요. 뼈도 간혹 씹혔는데, 그래도 싱싱한 어육으로만 만들어 맛이 정말 좋았습니다.”

오늘날 어묵은 냉동 연육(肉)을 주 원료로 만든다. 연육은 생선에서 머리와 내장, 껍질 등을 제거하고 살만 뽑아낸 것이다. 예전처럼 내장이나 머리를 쓰는 경우는 없다. 연육 유통업체 ‘장수’의 변현철 사장은 “어묵은 불순물을 제거한 순수한 어육으로만 만드는 식품”이라며 “단백질 함량이 높고 소화가 잘돼 건강에도 좋다”고 강조했다.

어묵의 재료로는 갈치 조기 노가리 밴댕이 쥐치 실꼬리돔 등 다양한 물고기(대개 흰살 생선)가 쓰인다. 요즘에는 국내 어획량이 줄어 어육 대부분을 연육 형태로 수입한다.

일본에서는 어묵 재료로 도미 등 고급 생선이나 대구, 상어 등 독특한 것들을 쓰기도 한다. 국내에서도 그물에 걸린 대형 상어를 어묵공장에 팔았다는 뉴스가 간혹 등장하곤 했다.

부산 등 항구에서는 일부이긴 하지만 아직도 갓 잡은 물고기의 생육을 어묵 제조에 쓴다. 그 비율은 어획량에 따라 수시로 바뀐다. 박경수 영진식품(www.youngjinfood.co.kr) 사장(68)은 “올해는 조기가 30년 만에 대풍”이라며 “싱싱한 조기 살을 풍족하게 쓸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나타냈다.

어육 비율은 공장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70% 내외다. 고급 제품에는 80% 이상이 들어간다.

아직도 ‘만드는 과정을 직접 보면 어묵을 먹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다. 그러나 요즘은 철저한 위생설비 안에서 제조한다. 출입자는 반드시 장화와 가운, 모자를 착용해야 하며, 공장에 들어가는 문과 나오는 문이 따로 있을 정도다.

현재 부산에서 매출 1억 원 이상 업체는 모두 식품안전관리인증기준(HACCP)에 따라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재래시장에 위치한 소규모 업체들도 나름의 위생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 중이며, 이와 관련해 정부 차원의 배려를 요청하고 있다.


○ 부산 어묵의 태동기

1961년 어묵 제조업에 투신해 지금까지 현역으로 활동 중인 박경수 영진식품 사장. O₂는 유명한 ‘초량어묵’의 원조인 박 사장으로부터 부산어묵의 옛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부산=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기자 “선생님 가족은 왜 부산에 자리잡으셨나요?”

어묵 “부산이 바닷가라 싱싱한 생선이 많다아입니까. 어묵은 다른 건 다 필요없습니더. 아무리 좋은 걸 넣어도 원재료가 파이면 고마 배리삡니다. 그래가 광복 후에 어묵공장이 부산에 많이 생겼십니더.

부산은 1876년 개항과 함께 일본인에 의해 본격적으로 개발됐다. 부산 어묵의 역사도 개항 후 일본인이 대거 정착하면서 시작됐다. 기자는 지난달 30일 부산에서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어묵 기술자 중 최고 경력의 박경수 사장을 만났다. 그는 1961년 기술자로 시작해 1966년 독립한 후 한길만을 걸어온 부산 어묵의 산증인이다.

▼ “쫄깃쫄깃 노르스름, 오뎅하면 역시 부산아인교” ▼

박 사장으로부터 지금까지 외부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부산 어묵의 옛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박 사장에 따르면 일본인 공장을 인수한 것이 아닌, 한국인이 세운 부산 최초의 어묵공장은 광복 직후 생긴 부평동의 동광식품이다. 그는 “초기 동광에선 고기포를 떠서 칼로 다듬은 후 돌절구에 갈았는데, 나중에 원동기를 들여와 자동화를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1950년에는 박재덕 씨가 영도 봉래시장 입구에 삼진식품을 설립했다. 이 공장은 6·25전쟁으로 피란민이 몰려들면서 큰 호황을 맞게 됐다. 1960년대 초 동광식품 공장장이었던 서동진 씨가 다른 기술자들과 합작해 영주동 시장에 환공어묵을 설립하면서 동광·삼진·환공의 3각 구도가 정립됐다. 나중에 환공어묵은 서 씨가 독자적으로 운영하게 됐다.

이후 ‘메이저’에서 기술을 배운 기술자가 대거 독립을 하면서 어묵업계는 춘추전국시대를 맞는다. 그렇게 1960년대에 생겨난 공장들이 영진, 미도, 대원 등이다. (‘부산의 노포·老鋪’ 참조, 부산일보 2011년 3월 10일자, 박상현 자유기고가)

박 사장은 시대별 어묵 제조 방법도 자세하게 들려줬다. “옛날에는 돌절구에 나무막대기를 넣고 사람 2명이 물레방아 돌리듯 생선살을 갈았습니다. 그걸 ‘대수리’라고 했는데, 어묵 공장을 ‘대수리 공장’이라고도 했지요. 그런 공장이 1960년대까지 있었어요. 일부 수공을 하는 공장 중엔 생선 머리만 잘라내고 ‘막갈이’를 하는 곳도 있었지요. 6·25전쟁 이후에 차 엔진이나 원동기가 들어오면서 기계화가 시작됐는데, 1960년대 중반 일본에서 채육기(採肉機·생선살에서 뼈를 발라내는 기계)가 수입돼 본격적인 대량생산 시대가 됐지요. 1970년대에는 어묵 모양을 자동으로 성형해주는 기계가 도입돼 자동화, 대형화가 더 확산됐습니다.”



○ 부산 어묵, 이젠 택배로 만나세요

기자 “선생님 가족이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 게 언제부터인가요? 저는 1990년대로 알고 있습니다만.”

어묵 “그게 아이고, 경부고속도로 개통(1970년) 직후부터 우리가 ‘전국구’가 됐습니더. 1일 생활권이 돼가 우리도 고속버스를 타고 대전이나 서울로 하루 안에 이동을 하게 됐습니더. 거기서 또 각지로 실려 나가고.”

기자 “그렇게 빨랐나요? 그럼 요즘은 어떠세요? 요즘도 인기 최고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어묵 “아이고, 그런 말 하지 마이소. 요즘에 이리저리 치이가 힘들어예. 저가 시장에선 밀가루 듬뿍 넣은 놈들한테 밀리고, 할인점이나 백화점은 대기업 제품 위주로만 깔아서 우리가 들어갈 구석이 없습니더. 그나마 택배 때문에 한숨 돌렸지예.”

박경수 사장은 “몇 년 전부터 ‘밀가루떡(밀가루 함량이 많은 어묵)’ 같은 비정상 제품 때문에 정상 제품이 밀리고 있다”며 불편해했다. 유통망이 재래시장 위주인 부산어묵이 할인점·백화점에서 대기업 제품에 밀리는 상황에 대해서도 아쉬워했다. 다만 최근 택배판매가 활성화돼 부산 어묵업계에 한줄기 빛이 되고 있다고 한다. “어려운 와중에 택배로 틈새시장을 개척한 셈이지요.”

예전 어묵공장 밀집지인 부평동 시장의 대리점들도 택배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환공어묵 대리점(www.환공어묵.kr)의 이상훈 사장(39)은 “이제는 택배 비중이 3분의 2 정도 된다. 한번 먹어본 분들은 꼭 다시 주문을 한다”고 설명했다. 그가 기자와 대화를 하던 중에도 서울 쌍문동 등에서 끊임없이 주문 전화가 걸려왔다. 이 사장의 부친은 환공어묵 설립자의 친척으로 15년 전 회사를 인수했다. 현재는 그의 형이 공장을 경영하고 있다. 부평동에 있던 어묵공장들은 더 넓은 자리를 찾아 김해나 사하구 장림 등으로 자리를 옮겼다. 공장 자리에는 대형 대리점들이 들어서 ‘깡통시장 오뎅골목’의 명성을 잇고 있다.


○ 분홍색 소시지-게맛살, 알고 보니 어묵일세

기자 “친척도 많다고 들었는데요. 왕래는 하고 사시나요?”

어묵 “뭐, 있기는 한데 왕래는 별로 없습니더.”

기자 “친척 중에 어떤 분들이 있습니까?”

어묵 “와, 옛날에 사람들이 도시락 반찬으로 좋아하던 분홍색 쏘세지 있지예? 가가 우리 친척입니더.”

기자 “아니, 정말인가요? 소시지는 쇠고기나 돼지고기로 만드는 거 아닌가요?”

어묵 “포장지를 한번 뒤집어가 보이소. 연육 OO프로라꼬 써 있지예? 요샌 오십프로 정도 들어가데예. 연육 값이 오리니까 돼지고기나 닭고기, 칠면조 고기 같은 걸 같이 넣는가 봅디다. 참, 혹시 서울 가서 게맛살 보거든 안부 좀 전해 주이소.”

기자 “게맛살은 게살 아닌가요?”

어묵 “이 양반이 정말 세상 물정 모르네. 게맛살을 명태살로 만드는 거 아직 몰랐습니꺼?”

부산에 가면 서울 사람들이 잘 모르는 어묵도 꽤 많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구운 어묵과 찐 어묵. 구운 어묵은 성형한 어육을 불에 구워 만드는데, 훈연향과 비슷한 고소한 구이 냄새와 단단한 질감이 특징이다. 대나무 대롱을 닮은 구운 어묵에는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긴 구멍이 뚫려 있다. 공장에선 이 구멍에 스테인리스 봉을 꽂은 후 어묵을 전열선 사이로 통과시켜 굽는다.

부산 지역에서는 명절 때 구운 어묵으로 탕을 끓여 먹는다고 한다. 명절 즈음엔 물량이 달려 공장들이 연장근무를 해야 할 정도. 그 맛을 잊지 못해 타지에 사는 부산 출신 사람들이 주문하는 양도 꽤 많다고 한다. 찐 어묵은 주로 우동에 넣어 먹는다.


○ 어육이 많이 든 어묵 고르는 비결


서울 종로구 종로6가 동대문종합시장 옆 골목에 있는 어묵 포장마차. 어묵 국물에서 나온 김이 추위를 피해 들어온 사람들을 포근하게 감싸준다. 포장마차 주인 김용자 씨(59)는 “날씨가 추워질수록 매출이 는다”며 “어묵은 부산에서 직송한 것만 쓰고, 국물은 꽃게로 낸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기자 “아까 좋은 재료가 많이 들어가면 다르다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뭐가 다른가요?”

어묵 “내 몸 한번 보이소. 어육 비율이 높으면 살색이 노리끼리하고, 뼈가 없어도 몸이 이래 탱탱합니더. 몸이 길어도 이렇게 탱탱한 탄력 함 보이소. 아, 말하다 보이 쪼매 야하네, 하하.”

기자 “어육 비중이 높은 어묵을 구분하는 방법이 있습니까?”

어묵 “당연히 있지예. 밀가루 함량이 많은 어묵은 물에 넣어두면 퉁퉁하게 불어버립니더. 그런 걸로 탕 한번 끓여 보이소. 잘못하면 냄비가 넘친다 아임니꺼. 어육이 많이 들어가면 절대 안그렇습니더. 그라고 어육이 마이 든 거는 꼬치 막대기가 잘 빠지지도 않습니더. 밀가루가 마이 들어간 건 그냥 쑥쑥 빠진다 아입니꺼. 제일 중요한 건 쫄깃쫄깃 씹는 맛이지예.”


○ 이젠 한국음식 아인교?

기자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어묵 “내사 뭐 말은 안 할라고 했는데, 기회가 왔으니 함 합니더. 자꾸 오뎅이 일본 음식이라면서 낮춰보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그 사람들은 소싯적에 어묵 반찬 안 먹어 봤는지 물어보고 싶습디더. 그라고 그런 사람일수록 일본 오뎅은 비싼 돈을 주고라도 사 먹어요. 100년 넘게 여서 살았으면 나도 여기 출신 아이겠습니꺼. 우리 할배가 어디서 왔든 그건 이제 의미가 없습니더. 일본식하고 다른 한국식으로 발전하고 있단 말입니더. 이젠 한국 음식 다 됐습니더. 일본 오뎅 중에 고급 재료로 만든 게 많다케도, 한국 사람 입맛에는 내가 더 맞다 아입니꺼. 참, 이제는 우리나라 기술이 일본보다 더 나은 점도 많습니더. 특히 유탕처리가 그렇지예. 그거는 우리가 훨씬 더 잘합니더. 일본에서는 한 시간에 어묵을 최고 2000개 만든다카는데 우리는 1만4000개나 만듭니더.”

기자 “다른 지역의 친척들에게도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고 하던데….”


어묵 “부산에서 만들어지지 않았어도 부산어묵이라고 이름을 붙이고들 다니던데요. 뭐, 부산오뎅이나 부산어묵이 법적으로 독점 상표권 등록이 안 된다고 해도 그건 좀 섭섭합니더. 오죽하면 부산 사는 우리 친척들이 ‘부산 어묵 고유상표’라는 걸 만들었겠습니꺼. 기자 양반, 그라고 우리가 서민 건강을 위해서 얼마나 애썼는지 좀 마이 알려주이소. 아까 조사 해봤다캤지요?”

이상한 소문이 떠돌았다. 앞으로 조선 독립(신탁통치 종료)이 되면 일본말뿐 아니라 옷이던 음식이던 일본 것은 모조리 못쓰게 된다는 소문이었다.

(중략) “아니, 정말이여. 신문에까지 났다는듸. 저 가마보꼬(어묵)는 참 일본 음식이 아니겟지? 조선 사람들도 잘만 먹으닝께.”

“본데야 일본 거지.”

“그렇지 않을 것이여! 아니, 우리는 가마보꼬가 없으면 밥을 먹는 같잖은듸.”(중략)

“그것도 본데는 다 일본 음식이지.”

“아니, 그럴 리가 있을라고? 우리 조선 사람들도 만 가지 요리에 다 쓰고 있는듸. 잔치에 안 쓰나 제사에 안 쓰나? 대체 정말인지 거짓말인지 내 눈으로 그 신문을 꼭 한번 봤으면 속이 시연하겟당게.” (동아일보 1949년 11월 8일자, 소설 ‘해방’, 김동리)

우리나라에서 어묵은 줄곧 서민의 음식이었다. 광복 전후 우리 백성들이 본시 조선음식인줄 알 정도로 어묵은 서민의 삶에 밀착해 있었다.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어묵은 간식이나 밥반찬으로 널리 쓰이는 친근한 식재료가 됐다. 쇠고기나 돼지고기에 비해 값이 싸면서도 양질의 단백질과 꽤 그럴싸한 맛을 전해주는 식품이었기 때문이리라.

광복 후 고급 일본식 어묵탕(오뎅)을 파는 술집들은 사라져갔지만, 어묵의 대중화는 더욱 가속화했다. 어묵은 가난한 연인들과 젊은이들이 추위를 쫓기 위해 애용하는 술안주 겸 군것질거리였다. 특히 ‘오뎅 국물’은 인심 좋은 포장마차에서 그냥 주는 공짜 안주였다.

“아, 좋시다. 그럼 포장마차에나 갑시다.”

“그래요, 오뎅이나 사 주면 먹죠.”

둘은 늘어선 공장들을 지나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구두방에서 양장점까지가 닥지닥지 붙어있는 좁은 골목길이 얼마간 이어지다 나타난 빈터에는 십여 대의 리어카가 늘어서 있었다. 오뎅 국물을 끓이는 김이 포장 속에서 새어나왔고 닭똥집을 굽는 냄새가 멀리까지 퍼져 왔다. (동아일보 1979년 3월 6일자, 소설 ‘달이 뜨면 가리라’, 한수산)

그러나 어묵은 출생의 ‘원죄’ 때문에 눈총을 받는 존재이기도 했다. 광복 직후인 194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 신문에 ‘오뎅’이란 말을 없애자는 이야기가 계속해서 올라왔다. 1949년 서울시 사회국은 ‘오뎅집’ 등 왜식간판 일소에 나서기도 했다. 많은 사람이 먹고 있음에도 어묵은 언제나 ‘일본 음식’이란 꼬리표를 달고 다녀야 했다.

하지만 ‘다꾸앙’이 단무지로 바뀌고, ‘이나리스시’가 유부초밥으로 바뀌었어도 여전히 오뎅이란 명칭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것은 어묵의 고향이 어디여서가 아니라, 오뎅이란 단어가 가지고 있는 묘하게 ‘서민적인’ 뉘앙스와 ‘촌스러운 친근함’ 때문이 아닌가 싶다. 생각해 보라. 오뎅보다는 우리말 어묵이 훨씬 고급스럽게 들리지 않는가. 치킨에 밀려난 통닭이 들으면 서운하겠지만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1940년대부터 오뎅의 순화어로 제시된 꼬치는 이제 거의 쓰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신 언중(言衆)은 촌스러운 오뎅이나, 우아한 어묵이란 말을 쓴다. 음식평론가 황교익 씨의 말처럼 음식 문화에선 책상머리 학자들이 아닌, 먹는 사람이 주체이기 때문이리라. 끝내 표준어로 인정받은 짜장면도 비슷한 경우다. 여기서 우리는 언중에 더해 식중(食衆)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하튼 이제는 한국에서 어묵이 해 온 역할과 사회적 기여를 인정해 줘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출처 : 2011.12.17 동아일보_http://bit.ly/1pYvmk2

첨부파일
비밀번호 * 수정 및 삭제하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관리자게시 게시안함 스팸신고 스팸해제
목록 삭제 수정 답변
댓글 수정

비밀번호 :

수정 취소

/ byte

비밀번호 : 확인 취소